〈착각의 잔상〉
1. “이 사진이면 연락 올 듯?” (그렇게 자기 합리화가 시작되었다)
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위로 들어 올린다. 화면에는 방금 설정한 새 프로필 사진이 떠 있다. 어제 친구들과 갔던 카페에서 찍은 거다. 창가 자리, 노을빛 조명, 테이블 위에 놓인 라떼 한 잔. 그리고 내 옆모습.
심플하고 무심한 것 같지만, 사실 무척 계산된 사진. 마치 이대로 영화 포스터로 써도 될 것처럼. ‘여기서 난 아주 우연히 찍혔어요’라는 듯한 연출. 하지만, 분명히 누군가 보길 바라는 사진.
나는 내 뇌를 의심한다. 헤어진 지 몇 달이 지난 지금도, 이렇게 사소한 걸로 혼자 소설을 쓰고 있다니.
2. 바닐라 라떼 한 모금이 우리 운명을 바꿨을 수도 있음 (근데 안 마심)
카페 배경이 눈에 익숙하다고 느끼는 순간, 기억이 허락도 없이 밀려온다.
그날 그는 바닐라 라떼를 주문했다. 나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. 그리고 그가 말했다.
*"쓴 건 잘 못 먹잖아."*
그는 언제나 그렇게, 내가 부정하는 나를 알고 있었다.
나는 웃으며 거절했지만, 사실 한 모금쯤 마셔볼 걸 그랬다. 그랬다면, 바닐라 라떼의 맛을 기억할 수 있었을까? 지금처럼 가끔 떠올랐을 때, 좀 더 생생하게.
이제야 깨닫는다. 문제는 그와 헤어졌다는 게 아니다. 문제는 그가 내 기억 속에서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거다.
3. “나 진짜 다 정리했어” → 카톡 알림 하나에 멘탈 나감
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.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.
창밖의 저녁노을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. 저 조명 아래 앉아 있으면, 지금이 몇 년 전인지 헷갈릴 것 같다. 내가 눈을 뜨면, 바로 앞에 그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.
"괜히 바꿨나."
한숨을 쉬며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든 순간, 카톡 알림이 뜬다.
[너 그 카페 갔었어?]
심장이, 어이없게도, 뛰기 시작한다.
[오랜만이네.]
4. 내 착각 200% 현실 체크 타임
손가락이 화면을 스르륵 밀어 내린다.
내가 이 사진을 올린 이유는 단순히 예뻐서였다. (아마도)
그리고 그가 이 사진을 보고 연락한 이유는 단순히 궁금해서일 거다. (아마도)
다시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라, 단지 그의 머릿속에 내가 3초쯤 떠올랐기 때문.
어쩌면 그는 이렇게 보낼 수도 있었다.
[여기 너 좋아했잖아.]
[이거 보니까 갑자기 생각났어.]
그러나 그는 딱 네 글자로 끝냈다.
그게 전부였다.
5. “이제 진짜 끝”이라고 다짐하는 87번째 순간 (안 끝남)
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천장을 바라본다.
커피 향도, 그날의 따뜻한 공기도, 결국은 내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었다. 프로필 사진 하나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.
나는 내 감정을 하나하나 해체해 본다.
그를 다시 원한 걸까?
아니면, 그가 떠올리게 한 ‘그때의 나’가 그리운 걸까?
대답을 알 것 같아서, 일부러 모른 척한다.
6. 답장은 하지만, 기대는 안 한다는 (거짓말 ON)
휴대폰을 다시 집어 든다.
[응, 어제 친구들이랑.]
이제야 깨닫는다. 과거에 대한 미련과,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.
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다.
하지만, 진짜 그럴까?
